미술관에 가는 여자는 위험하다
이유리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저자
서정혜 2025-05-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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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것밖에 못 봤어? 에휴, 난 저쪽 의자에 앉아 있을 테니 다 보면 연락해.”

 

언젠가부터 미술관에서만큼은 ‘동행인’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이왕 찾아간 미술관이라면, 그림의 표면만 대충 보고 지나가기엔 아쉽지 않은가. 한 작품, 한 작품씩 정성껏 바라보다 보면 관람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면, 미술관 구석 벤치에서 죽을상을 한 채 널브러진 동행인(대개 남편과 아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빙글거리며 “미술관에 가자”라고 말하는 순간, 남편과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주여!”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을. 미술관 동행은 그들에겐 일종의 벌칙이나 다름없다는 자각.

 

그래서 나는 홀로 미술관에 가는 것을 즐긴다. 내 속도대로 그림을 바라볼 때, 마음이 훨씬 편안해진다. 내게 그림 감상이란 내면 깊숙한 곳에서 펼쳐지는, ‘나와 작품과의 비밀스런 화학작용’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라는 책이 있다. 저자인 심리치료사 플로렌스 포크는 외로움을 호소하며 우울증까지 앓게 된 안나라는 여성에게 이런 과제를 준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동행인과 함께 온 사람, 그리고 혼자 온 사람의 수를 세어 보세요”

 

안나는 직접 미술관을 둘러보다가 깨닫는다. 혼자 있는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울한 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성장하는 시간, 고요한 자유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런데 플로렌스 포크는 알았을까? 200년 전만 해도 ‘혼 미술관’을 즐기는 여자라는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애초에 미술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남성 예술가들이 그린 작품을, 남성 관람객들이 보러 가는 곳. 그것이 미술관이었다. 남성 일색이던 예술계에서 여성이 허락받은 자리는 단 하나, 남성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Muse) 역할을 할 때뿐이었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체통을 지켜야 하는 신사들이 죄책감 없이, 눈치 보지 않고 여성의 누드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곧 미술관이었다. 그들은 누드화 속 붓 터치와 구도를 토론하는 척하며, 몰래 헛기침을 하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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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그랑드 오달리스크(La grande odalisque)>, 1810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이런 남성 관람객들의 편의(?)와 취향을 노골적으로 반영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장면을 담은 그림인데, 폭이 무려 162cm에 달한다. 거의 실제 크기 여성의 몸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는 셈이니, 당시 남성들의 느꼈을 황홀감(?)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황홀함이 어떻든 간에, <그랑드 오달리스크>가 해부학적으로는 ‘엉터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성의 허리가 지나치게 길어 마치 척추뼈가 두세 개 더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앵그르가 해부학 지식이 부족해서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체 비례를 무시하고 그렸다는 데 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남성 관람객들의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하려고 일부러 여인의 몸을 길게 ‘늘여놓은’ 것이다. 덕분에 남성 관람객들은 그림의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시선을 옮겨가며 여성의 몸을 천천히 훑을 수 있었다. 치밀한 앵그르 되시겠다.

 

이처럼 남자들만 모여 재미를 누리던 공간에 여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든다면? 아마도 남성들은 ‘침입’으로 느꼈을 것이다. 여성들이 미술관에 오는 것을 막아야 했기에, 남성들이 들고나온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누드화가 여성들의 선천적 순수성과 수치심을 상하게 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미술관에서 남성 누드 조각상과 마주치면 부채를 파닥거리며 일부러 기절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태연하게 지나치다간 자칫 ‘조신한 여자가 아니다’라는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술관뿐만이 아니었다. 상류층과 중산층 여자들은 ‘샤프롱(Chaperon)’이라고 불렸던 동반자 없이는 어디에도 홀로 갈 수 없었다. 동행자가 없는 여성을 흔히 ‘천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홀로 미술관에 간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독일 철학자 칸트가 이렇게 꼬집을 정도였다.

 

“남성은 뒤에서 여성을 돌봐주는 척하면서 그들을 감독한다. 가축을 기르는 것처럼 이 ‘조용한 피조물(여성)’이 테두리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여 어리석은 상태에 머물게 만들고, 혹 독립하려 하면 위험에 빠질 거라 협박한다.”

 

그러나 ‘남성만의 미술관’을 지키려 한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 쾌락에 방해가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안나가 깨달은 바와 같이, 미술관은 ‘혼자 있는 힘(혼자력)’을 기를 수 있는, 일종의 자궁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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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치 연작',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혼자력’이 왜 중요할까. 미국 평론가 수전 손택은 “글쓰기는 열기구, 우주선, 잠수함, 그리고 옷장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 온전히 집중하고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어딘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로 말했다. 글쓰기의 전제가 곧 사유이기 때문이고, 사유를 위해서는 혼자만의 환경이 필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 혼자일 때에야 비로소 생각이 움튼다.

 

드디어 이를 깨달은 여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여성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삶의 지휘권을 되찾으려는 강렬한 저항을 이어갔다. 그 결과, 여성들도 미술관에서 홀로 그림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 ‘홀로’가 여성들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 오직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롭고 내밀한 공간이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사실 자신 혹은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와 다름없다. 혼자 전시를 본 여성들은 눈앞의 작품을 곱씹으며 질문하고, 생각했다. 그 질문은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을 낳았고, 그 의문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세계상을 키웠다. 이때 여성들의 머릿속에 싹튼 세계상은 가부장제가 강요해온 ‘전통적인 모습’과 단연코 일치하지 않았다.

 

미술관은 그녀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줬고, 상상력은 여성이 가부장제의 일렬종대에서 벗어나 ‘문턱 너머 저편’(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표현)으로 날아가는 데에 힘을 보탰다. 문턱 너머 저편엔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여성 자신조차도.

 

그랬기에 미술관에 가는 여자들은 위험했다. 어쩌면 남성 중심 사회는 미술관이 그런 ‘불온한 사유’의 지평을 넓혀줄 옥토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가부장제뿐만 아니다. 자본주의, 비장애 중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이 모든 억압 기제는 늘 미술관과 긴장 관계다. 생각이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는 곳, ‘여기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뻗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미술관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미술관에 홀로 발을 디디며, 기꺼이 ‘위험한 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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