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보훈지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계기 임시정부 요인 유족 위문
김완규 2020-04-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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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주 경기동부보훈지청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계기로 2일부터 3일까지 임시정부 요인 김붕준, 박찬익, 윤세용, 이강, 이유필 지사 5인의 유족을 위문하고, 대통령 명의의 위문품도 전달한다.
 
경기동부보훈지청 청사 전경 사진.jpg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19193·1운동의 확산 이후 국외에 근거지를 두고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고자 했던 애국지사들의 노력으로,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최초의 민주 공화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념일이다.
 

김붕준 애국지사는 평안남도 용강 출신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의정원의원, 임시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으며, 이후 건국에 전념하다가 1950년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박찬익 애국지사는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1904년 관립 상공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모의로 퇴학당하고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0년 합병 이후 북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의 포교 및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27월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했고, 191811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대중 외교를 통해 임시정부를 지탱해 나갔으며, 낙양군관학교 내 한국 독립군 양성 특별반 설치에도 공헌하였다. 1940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세용 애국지사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1910년 국치 이후 가재를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한 뒤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단과 부민단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고마령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로 남만주의 참의부가 위축되자, 1926년 참의장으로서 참의부의 체제 정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941년 북만주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강 애국지사는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이다. 1904년 미주에서 교민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했으며, 이후 기관지 공립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1907년 신민회 창립을 위하여 귀국하였고, 창립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에는 재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해조신문(이후 대동공보로 변경)의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19년 강우규 의사 의거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서울로 체포되었으나, 1919년 말 석방되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하고, 흥사단 운동에도 진력하였다. 이후 일제의 간섭을 피해 남중국으로 떠났으며, 1928년 일제 경찰에 납치되어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복건성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유필 애국지사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신민회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2사내(寺內) 총독 암살 음모 날조사건으로 진도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내무부 비서국장, 상해대한인민거류민단 의사원 등의 직책을 맡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08월 미국의원 동양시찰단의 중국 방문 시기 준비위원에 임명되어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후 내무총장, 재무차장, 국무원 등의 직위를 거쳤다. 1922년에는 10 노병(勞兵)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303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총무이사에 선출되었고, 1932년에는 김규식과 같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조직을 준비하였으나, 1933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평북에서 반공지도자로 활동하다 월남 도중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용주 지청장은 우리는 작년 이맘때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쳤다. 101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코로나-19 막아내는 중이지만, 국민들의 안전을 우선한 까닭에 기념 행사들이 거의 취소되어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국민들께서 잊지 말고 기억해 주셔야 역사적인 날들은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독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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